‘개척’은 경상대의 교훈이다. 개척탑은 1973년 7월 11일에 건립되었다. 칠암 캠퍼스에서 학교를 다닌 우리세대는, 개척탑이 대학본부 앞 잔디광장의 가장자리 중앙에 자리하고 있어서, 약속을 하거나 하면 몇시에 개척탑 앞에서 보자고 할 정도로 캠퍼스 생활의 중요한 이정표가 되기도 하였다.
이 개척탑의 건립 경위를 적어 놓은 탑지가 준공기가 적힌 명판 교체작업 중 발견 됐다고 한다.
탑지에 적힌 내용을 정리하면,
개척탑은 “칠암 학형들의 성금으로서 경상대학의 영원한 상징으로 창조의 의지를 한데 모은 개척정신을 그 전통의 흐름으로 삼고자” 건립을 추진하였으며,
추진위원장은 당시 제25대 학생회장인 박창명 회장이 맡았고 유인자, 강영일, 문인규, 이영진, 우재욱, 박영숙, 김성환, 하윤규 등 8명의 학생회 간부진으로 추진위원을 구성했다.
또 형성해 학장, 빈영호 교무과장, 이희석 학생과장, 김상조 문화재 전문위원을 지도위원으로 위촉하여 “경상대학의 영원한 상징으로서 개척의 탑을 건립할 것을 결의”하게 됐다. 설계는 김상조, 탑명 휘호는 정명수, 글 지은이는 려증동, 글쓴이는 강영일 등이 수고했다고 적혀있다.
박창명 당시 학생회장(축산학과 70학번)은 경상대 출신 장성 중 한 명으로 육군대학 총장을 역임하고, 병무청장을 역임하였다. 빈영호 당시 교무과장은 제4대 경상대 총장을 지냈다. 려증동 교수는 경상대 국어교육과에서 많은 후학을 양성하였다.
탑석은 산청군 신안면 원지(당시 빈영호 교무과장의 고향) 주민들의 협조로 공군 9821부대와 육일운수 등에서 지원하여 1973년 5월 8일 기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학생들의 의지와 달리 개척탑을 건립하는 데는 어려움이 많았던 것 같다.
탑지에는 “재정난으로 허덕이는 중 민관식 문교부 장관께서 50만원을 희사하여 순조로이 진척되어 흥농토건사 진주석공공업사의 시공으로 7월 11일 제막하게 된 것”이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