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16일 집사람과 함께 낙안읍성을 방문했다. 10여년 전에 학과 교수님들과 왔었는데, 그 때는 경황이 없었고, 이번에는 넉넉히 시간을 갖고 둘러보았다.
우선 원광대학교 사학과의 어느교수가 정리해 놓은 자료를 일부만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순천시 낙안면에 소재한 낙안읍성 민속마을은 넓은 평야지에 축조된 성곽으로 성내에는 관아와 100여 채의 초가가 돌담과 싸리문에 가려 소담스레 옛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옛 고을의 기능과 전통적인 주거공간에서 생활하는 서민의 모습을 통해 오늘날(현재 108세대 300여명이 살고 있음)에도 보고 느낄 수 있는 살아있는 전통문화로서, 낙안읍성은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라고 하였고, 역사적인 변천으로는 “낙안은 먼 옛날 삼한시대에는 마한(馬韓)의 54국 중 신분활국(臣墳活國)이었으며, 백제시대에는 분차(分嵯), 분사(分沙), 부사(夫沙)라고도 불리 운 파지성(波知城)이었고, 통일신라 경덕왕 16년에는 분령군(分嶺郡)으로 조양(兆陽), 충렬(忠烈), 백주(栢舟), 동원(董原) 4개의 속현(屬縣 현 보성군 고흥군 일대)을 가졌다. 고려시대에는 태조 23년(940년)에 양악(陽岳), 낙안(樂安)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그 뒤 고려 헌종 9년(1018년)에는 나주부(羅州府)에 소속되었고, 고려 명종 2년(117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가 뒤에 다시 지군(知郡)으로 승격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세조 12년(1466년) 지군(知郡)에서 군수(郡守)로 고쳤으며 중종 10년(1515년) 군내에서 불미한 사건이 발생하여 현령(縣令)으로 격하되었다가 선조 8년(1575년)에 다시 군(郡)으로 승격하였다. 19세기말까지 낙안 군수는 순천진관병마동첨절제사(順天鎭管兵馬同僉節制使)를 겸했다. 순종 1년 (융희 2년) 1908년 10월 15일 칙령 제72호로 낙안군이 폐지되면서 순천군 낙안면이 되었고, 1949년 8월 14일 순천읍이 시로 승격되면서 승주군 낙안면이 되었다가 1995년 1월 1일 시군 통합에 의하여 순천시와 승주군이 통합됨으로써 현재의 순천시 낙안면이 되었다.” 라고 한다.
순천 낙안읍성은 현존하는 조선시대의 읍성들 가운데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곳으로 특히 성 안에는 전통적인 가옥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삼한시대에 마한, 삼국시대엔 파지성, 고려말 이후부터는 낙안군 지역으로 성곽은 조선 태조 6년(1397) 낙안출신, 전라도 수군도절제사 양혜공 김빈길 장군이 왜구의 침입에 맞서기 위해 쌓았고, 석성으로 중수된 것은 그로부터 약 300년 후인 인조 4년(1626) 충민공 임경업 장군이 낙안군수로 부임한 이후라고 한다.
읍성 전체 모양은 장방향으로, 성곽 길이는 1,410m이고, 전체면적은 223,108m2이다. 동,서,남쪽 3곳에는 성안의 도로와 서로 연결된 문이 있고, 4군데의 치성이 있어 적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한 선조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낙안읍성은 1983년 6월 14일 사적 제302호로 지정 되었고, 현재는 총 13점의 문화재(국가지정 10, 도지정 3)를 보유하고 있으며, 201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장 안내판 참고]
낙풍루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으로 된 2층 누각건물로 관람객들이 주로 이용하는 출입문이다.
낙풍루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으로 된 2층 누각건물로 관람객들이 주로 이용하는 출입문이다.
동헌은 고을의 수령이 사무를 보던 공간이다.
골목길과 집안마당 그리고 주막 등을 재현해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