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 광한루원

전북 남원시에 있는 조선전기에 조성된 정원으로 춘향과 이도령이 만났다는 광한루를 포함한 정원 전체를 광한루원(廣寒樓園)이라 하는데, 면적이 6만 9795㎡이며, 명승 제33호로 지정되어 있다.

남원의 광한루원은 내가 자주 가는 곳이다. 우리 지역 인근에는 광한루원 만큼 잘 조성되고 관리되고 있는 옛 모습을 간직한 정원을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의 광한루원을 사진에 담고싶은 욕심에 때로는 혼자서, 때로는 친구들과, 때로는 집사람과 이곳을 들린다. 언제 보아도 운치가 있고, 전각과 연못 그리고 나무와 하늘, 구름다리와 물속의 반영, 연못에 반사되어 전각과 나뭇잎의 음영을 없애주는 빛, 그러니 이곳의 사진은 다른 곳의 사진과는 분명히 다른 무엇이 있다. 

사계절의 광한루원을 정리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어 보여서 이곳에 정리되는 대로 올려 보고자 한다.

천년의 역사를 가진 광한루, 보물 제281호, 명승 제33호

지금의 광한루는 1170년(의종 24) 전중감(殿中監)이었던 황공유(黃公有)가 무신의 난으로 벼슬을 버리고 남원으로 내려온 뒤, 그의 후손 황감평이 이곳에 일재(逸齋)라는 조그마한 서실(書室)을 지은 때부터 유래된다.
광한루의 시초는 조선 세종 원년(1419) 황공유의 아들인 황희(黃喜)가 한때 남원에 유배되었을 당시, 일재의 옛터에 광통루(廣通樓)라는 작은 누각을 지어 산수를 즐긴 것에서 비롯된다.
1444년(세종 26)에는 전라도관찰사 정인지(鄭麟趾)가 광통루의 아름다움을 월궁(月宮)에 비유하여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라 칭한 것에서 광한루라 부르게 되었다.
1461년(세조 7) 부사 장의국(張義國)은 누원 일원에 요천강의 맑은 물을 끌어다가 은하수를 상징하는 호수를 만들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광한루원(廣寒樓苑))]

봉래섬, 방장섬, 영주섬은 오백년 전에 만들었다.

1582년 정철(鄭澈)이 전라도관찰사로 부임하여 또다시 은하의 못 가운데 신선이 살고 있다는 전설의 삼신산을 상징하는 봉래(蓬萊)·방장(方丈)·영주(瀛洲)섬을 만들어, 봉래섬에는 백일홍을 심고 방장섬에는 녹죽(綠竹)을 심었는데, 영주섬에만 영주각을 건립하고 섬과 섬 사이에는 사다리꼴 다리로 연결하였다. 이로써 광한루원은 천체와 우주를 상징하는 누원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왜적들의 방화로 모두 불타버렸다. 1607년(선조 40)에 작은 누각이 복구되고, 1639년(인조17)에 남원부사 신감(申鑑)이 현재의 광한루를 복원하였다. 1794년(정조 18)에는 부사 이만길(李萬吉)이 영주각을 재건하였다. 1963년에는 주변의 토지를 매입하고 호수 주위를 정비하여 국악원, 월매(月梅)의 집과 방장섬에 육모정을 세웠으며, 이듬해인 1964년에는 방장섬에 방장정(方丈亭)이 건립되었다. 1965년에는 영주각을 단청하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광한루원(廣寒樓苑))]
방장섬, 봉래섬, 영주섬
방장섬과 방장정
영주섬과 영주각

완월정과 정원의 확장

1969년에는 호수를 확장하고 수중누각 완월정을 세우는 한편, 지금까지 북쪽을 정문으로 써 오던 것을 후문으로 삼고 따로이 남쪽에 정문을 신축, ‘廣寒淸虛府(광한청허부)’라는 현판을 써 걸었다. 1983년에는 다시 경역을 확장하여 누원 주변을 정비, 사적으로 지정하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광한루원(廣寒樓苑))]

완월정
오작교
광한루와 연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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