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사마을을 예담촌이라 부르게 된 것은 마을에 수백년씩 된 한옥들이 많고, 이들 한옥을 둘러싼 오래된 담장이 많다고 하여 예담촌이라 한다. 오랫동안 대를 이어 살아오던 집들을 잘 관리하고 보존한 것이 오늘날에는 희귀한 마을이 된 것이다.
남사에는 이 지역 주요 집안의 종갓집들이 많고, 문중의 재실도 많다보니 자연 집들의 규모나 형태 등이 상당히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고, 요즘은 일부 문중에서는 한옥을 개방해서 민박과 같은 한옥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도 한다.
남사 예담촌에는 옛 모습을 간직한 골목길과 높이 둘러친 오래된 돌담들 그리고 연륜만큼이나 다양한 담쟁이와 야생초와 야생화들…
그러나 이곳에는 그 연륜만큼이나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아직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도 많겠지만 이미 알려진 이야기만 해도 우리들의 호기심을 들춰내기에는 충분해 보인다. 진양하씨 원정공이 원정매를 심고 즐겼다는 이야기, 충무공 이순신 장군께서 백의종군시 이곳에서 하룻밤을 머물렀다는 이야기, 조선 개국공신 이개공이 왕자의 난 이후 이곳에 터잡은 이야기, 여기에 조선의 마지막 지성이라는 면우선생이 이곳에서 태어나고 성장했다는 이야기 등등 수많은 이야기들이 그 흔적과 함께 알려져 있다.
남사예담촌의 남사천 옆의 언덕에 이사재가 있고 그 앞에는 충무공 백의종군 유숙지 표지가 있다.
임진왜란 당시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한 이순신 장군이 모함으로 인해 한양으로 압송되어 죽을 위기에 놓였다. 이때 영의정 류성용과 판중추부사 정탁 등의 진언으로 사형의 위기를 넘기어 1597년 4월 1일 옥에서 나왔다. 그러나 왕의 명은 ‘백의종군’이었다. 삼도수군통제사에서 계급 없는 군인으로 강등된 이순신은 같은 해 4월 3일 한양을 출발하여 6월 2일 초계에 도착했다.
난중일기에 이때 ‘백의종군’하는 이순신 장군의 행로가 나와 있다. 이순신 장군은 1597년 6월 1일 하동군 옥종면 정수리에서 출발하여 오후 늦게 산청의 단성면 사월리 박효원 종의 집에서 유숙했다. 종의 집 헛간에서 빈대에 물려가며 잠을 설치면서도 구국의 일념으로 백의종군 길에 오른 이순신 장군은 날이 새자 길을 재촉하여 6월 2일 늦은 아침에 단계천(현재 산청 단계마을) 가에 도착하고 이곳에서 아침을 먹었다. 이후 삼가를 거쳐 권율 장군의 진영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46일 간 머물다가 칠천량 해전의 참패 소식을 듣고 나서 권율 장군의 말에 따라 남해의 전세를 살피기 위해 7월 18일 삼가현을 거쳐 7월 19일에 단계천변을 지나 지금의 신안면 백마산성에 올라가서 지세를 살피고 단성현에서 하룻밤 유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