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 조식선생과 얽힌 수많은 이야기가 있는 산청군 시천면의 덕천강과 산천재 등을 사진을 위주로 해서 정리해 본다.
산청군 시천면 덕산에 있는 산천재는 남명 조식선생이 후학을 가르치던 곳으로 유명하고 안뜰에 심겨진 남명매는 오늘날까지도 수세가 강건하다.
그러나 산천재를 찾다 보면 담장밖의 정원에 핀 매화가 싱싱하고 깨끗한 느낌을 준다. 또한, 노랗게 핀 산수유는 다소 밋밋한 이곳 분위기에 채색을 더하며 더욱 산뜻한 느낌을 자아낸다.
曺植(1501-1572)
자는 楗仲, 호는 南冥·山海·方丈老子·方丈山人 등이며, 본관은 昌寧이다
1) 出生과 成學(0-31세)
남명은 연산군 7년 신유년(1501) 6월 26일 三嘉縣 兎洞에 있는 외조부 충순위 李菊의 집에서 태어났다. 남명의 증조부 생원 조안습이 창녕에서부터 삼가현 板峴으로 이주하여 비로소 삼가 사람이 되었고, 아버지 조언형은 같은 고을 토동에 사는 이국의 딸과 혼인함으로써 토동이 남명의 본거지가 될 수 있었다.
2) 山海亭 시대(32-47세)
32세 때 서울 집을 정리하고 김해의 山海亭에 머무르기 시작하여, 어머니의 侍墓가 끝나는 1548년에 본거지 兎洞으로 귀향하게 되는데, 그 사이의 기간이 山海亭 시대다. 남명은 비록 과거를 포기하였으나, 어머니의 명에 의해 계속 과거에 응시하였다가, 37세 때 드디어 어머니에게 청하여 과거에 응시하지 않게 되었다.
3) 雷龍舍 시대(48-60세)
48세 때 典牲署 主簿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 해에 鷄伏堂과 雷龍舍가 이루어졌다. 계부당은 닭이 기를 끊지 않고 알을 품어 주어야 병아리를 부화할 수 있듯, 학문도 이처럼 꾸준히 기를 간직해야 뜻한 바를 이룰 수 있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뇌룡사는 ‘淵黙而雷聲[연못처럼 잠잠하다가 우레처럼 소리친다.]’에서의 ‘雷’와 ‘尸居而龍見[시동처럼 거처하다가 용처럼 나타난다.]’에서의 ‘龍’을 합친 뜻이 들어 있는 精舍다.
4) 山天齋 시대(61-72세)
남명은 61세 되던 해에 두류산 천왕봉이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진주의 德山 絲綸洞으로 거처를 옮겼다. 거처하는 곳의 이름을 山天齋라 하였는데, 이는 『周易』 大畜卦를 뜻하는 말이다. 이곳에 거처를 옮기면서 남명은 스스로 그 이유를 「德山卜居 」라는 시로 표현하였다.
더 자세한 내용은 경상대학교 고문헌시스템을 위 제목의 링크를 따라가면 볼 수 있다.
남명 조식 유적(사적 제305호) 안내판 자료를 옮겨본다.
조선시대의 대표적 사상가이자 대학자인 남명 조식(1501~1572)선생의 유적이다. 선생의 자는 건중, 본관은 창녕, 호는 남명이다.
선생은 1501년 현재의 합천군 삼가에서 태어났다. 30세가 되던 해에는 처가가 있는 김해 신어산 아래에 산해정을 지어 학문을 연구하고 강론하였고, 48세부터는 삼가의 뇌룡사를 지어 찾아오는 제자들을 가르쳤다.
조정에서 선생에게 단성현감 등 여러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그러나 현실에 대한 과감한 비판과 임금의 잘못된 정치에 대하여 직언으로 상소하는 등 나라와 백성에 대한 강한 애정을 드러내었다. 61세 때 지리산 천왕봉이 바라보이는 이곳에 산천재를 지어 제자들을 가르치다가 72세로 일생을 마쳤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정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여기에는 남명선생관 관련된 산천재, 덕천서원, 세심정, 묘소, 신도비, 여재실 등의 사적이 있다. 산천재는 선생이 여생을 보낸 곳으로, 마루 위 벽에는 밭가는 그림 등 벽화 3점이 남아있다. 덕천서원은 1576년(선조 9년)에 선생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지은 것인데, 1609년에 사액서원이 되었다. 그러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20년대에 복원되었다. 세심정은 덕천서원 앞 강가에 있는데, 학문하는 여가에 휴식하는 곳이다. 묘소는 산천재 뒷산에 있는데, 선생이 생전에 손수 자리 잡은 곳이다.
신도비는 우암 송시열이 비문을 지었는데, 남명기념과 경내에 있다.
여재실은 문중에서 제사를 지내는 가묘로 별묘라고 일컫기도 한다.
[현장 안내판 참고]
산천재는 선생이 여생을 보낸 곳으로, 마루 위 벽에는 밭가는 그림 등 벽화 3점이 남아있다.
산천재 안내문에는 이곳은 남명 조식(1501~1572)선생이 61세 때부터 돌아가실 때 까지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양성하던 장소이다. 산천 이란 주역 대축괘의 괘상으로, ‘굳세고 독실한 마음으로 공부하여 날로 그 덕을 새롭게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선생은 천왕봉이 바라보이는 이곳에서 국왕에게 세 차례 글을 올려, 국가와 사회의 기강을 바로 잡을 것과,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할 것을 건의하였다. 우리 정신의 큰 봉우리인 선생이 학문과 인격을 완성하고 백성과 나라를 걱정하던 노학자의 정신을 되새겨야 할 것이다.
오른편 두 수의 시는 선생이 이곳에서 지은 것으로, 선생의 큰 뜻과 높은 기상이 잘 나타나 있다.
산천재는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으로 소박한 규모이다. [현장 안내판 참고]
이 매화나무는 남명 조식(1501~1572년)선생이 61세에 천왕봉이 바라보이는 이 곳에 산천재를 짓고, 뜰에다 심은 것이라 전한다. 기품있는 모습은 선비의 기상을 잘 나타내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이를 남명매라 부른다.
나무 아래에는 조그만 검은 돌에 남명매를 읊은 시 한 수가 새겨져있다.
偶吟 (우연히 읊다)
朱點小梅下 (작은 매화아래서 책에 붉은 점 찍다가)
高聲讀帝堯 (큰소리로 요전을 읽는다)
窓明星斗近 (북두성이 낮이지니 창이 밝고)
江闊水雲遙 (강물 넓은데 아련히 구름 떠 있네)
[현장 안내판 참고]
이 책판은 남명 조식의 시문집의 제작을 위해 제작한 목판이다. 선생의 문집은 몇 가지 사유로 인하여 여러 차례 변천을 겪었는데, 크게 세가지 경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인조반정 이전에 간행된 초기본인 갑진본 계통이 있고, 이후 처음 간행을 주도하였던 정인홍과 관련된 내용을 삭제하고 체제에 다소 변화를 가져온 이정본 계통이 있으며, 고종 연간에 문집의 내용을 대폭적으로 수정한 중간본 계통이 있다. 문집은 처음 1602년(선조 35) 해인사에서 간행하였으나 판각이 불에 타 1604년(선조 37)에 다시 간행하여 배포하였으며, 이후 이정본에서는 편년 등의 내용 추가되고 ‘학기유편’과 ‘산해 사우연원록’까지 포함한 이정합집본이 간행되도록 하였다. 현재의 목판은 중간본 계통의 최후 간행본으로 185매로 6책의 완전한 분양이 보존되어 있다. 선생의 문집은 선생의 학문의 맥과 깊이를 전해 주고 있을 뿐만아니라, 지역에 관한 다양한 역사적 사실들을 전하고 있어 남명학 연구는 물론 지역사 연구에도 좋은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현장 안내판 참고]
산천재 앞에는 덕천강이 흐르고 있다. 지금은 강둑이 조성되고 강둑을 따라 도로가 만들어져 있지만, 아마 예전에는 산천재는 덕천강 강둑 언덕 정도의 위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니 강변에 산천재를 지은 것이다. 이는 젊은 시절 남명선생이 삼가에서 거처하였던 뇌룡정 또한 강가에 위치해 있어 나름대로 연관성이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최근에는 산천재 앞 강에 징검다리를 만들어서 강을 건널 수 있게 해 놓았다. 그런데 이 징검다리 위에서 지리산 천왕봉을 바라보면 앞에 걸림이 없어 잘 조망할 수 있다.
산천재 쪽에서 징검다리를 따라 눈길을 주면 건너편 언덕위 꼭대기에 팔각정이 눈에 들어온다. 아마 지리산 천왕봉을 덕산마을과 함께 조망하기 위해 세운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