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면시배유지와 문익점 선생

14세기 삼우당 문익점 선생은 목화씨를 가져와 재배에 성공하고, 백성들이 무명옷을 지어입고, 솜이불을 덮을 수 있게 함으로써 가히 산업혁명을 일으키신 분이다.

단성 사월에서 태어나신 문익점 선생이 목화를 최초로 시험재배한 유적지가 산청의 경호강 강변에 있다. 

삼우당 문익점 선생은 고려말 고위 공직자로서, 원나라에서 목화씨를 가져와 재배를 성공하고, 목화로부터 실을 뽑고, 무명옷을 만들어 입을 수 있도록 함으로써, 수 많은 백성들이 대대로 무명옷을 지어입고, 솜이불을 지어 덮을 수 있게 하였으니, 가히 산업혁명을 일으키고 민초들에게 물질적 풍요를 주신 분이다.

문익점 선생의 약력

 

본관은 남평(南平)이고 강성 문씨(江城 文氏)의 시조이기도 하다. 초명은 문익점(文益瞻), 자는 일신(日新), 호는 사은(思隱) 또는 삼우당(三憂堂)이다. 관직은 성균관대사성에 이르렀고 작위는 강성군에 봉군되었다. 시호는 충선(忠宣)이다.

1360년(공민왕 9) 문과에 급제한 후 김해부사록과 순유박사 등을 거쳐 1363년 사간원좌정언으로 재직 중 원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덕흥군을 지지하였다가 파면당하였다. 그 뒤 고향에서 목화 재배를 하다가 우왕 즉위 후 전의감주부와 좌사의대부를 거쳐 성균관대사성에 이르렀다. 그는 이성계(李成桂), 정도전, 조준 일파에 의하여 추진된 전제개혁(田制改革)에 반대했다가 조준의 탄핵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사후 조선 태종 때 참지의정부사 강성군(江城君)에 증직되고 세종 때인 1440년(세종 22) 영의정부사 부민후에 가증되었다.

 

위키백과 문익점편 참고

산청 목면시배 유지(山淸 木棉始培 遺址), 사적 제108호

문익점의 고향인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의 문익점면화시배지(文益漸棉花始培地)는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108호 《산청 목면시배 유지》(山淸 木棉始培 遺址)로 지정되었고, 이곳에 삼우당선생면화시배사적비(三憂堂先生棉花始培事蹟碑)가 세워졌다. 문익점이 목화씨를 가지고 와 재배에 성공하고 이를 가공하여 의복을 짓게 된 경로를 밝힌 기록은 후대의 학자 남명 조식이 쓴 《목면화기 木棉花記》에 수록되었다.

이 유적은 1363년(공민왕 12) 문익점이 중국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3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고 돌아오면서 목화씨를 몰래 붓통에 숨겨가지고 들여와 그의 장인 정천익(鄭天益)에게 부탁하여 처음으로 목화를 재배하였던 곳이다. 또, 부근의 마을은 문익점의 출생지이기도 한데, 이 마을은 목화재배의 유래를 간직해오면서 지금도 배양(培養)마을로 불리고 있다. 

배양마을에서 지리산으로 향하는 옛 길가에는 오른편으로 나지막한 돌담을 둘러싸고, 그 안에 ‘三憂堂文先生棉花始培地(삼우당문선생면화시배지)’라고 제목을 붙인 사적비가 서 있는데, 이곳이 바로 처음으로 문익점에 의해서 들여온 목화씨의 싹을 틔우는데 성공하였던 옛터이다. 지금도 이곳에서는 문익점의 업적을 기리는 뜻에서 옛터에 밭을 일구어 해마다 목화를 재배하고 있고, 고속도로 톨케이트에서 부터 길가에 목화를 재배하고 있는데, 이는 이곳이 목화재배의 시발지임을 알리기 위함이다.

비석군을 지나 안쪽으로 가면 면화전시관이 있다. 이곳에는 목화의 솜을 이용해서 무명베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밀납인형이 각종 도구를 이용하는 것을 설명과 함께 재현해 놓았다.

– 씨아기 작업 : 목화를 재배 수확하여 건조한 솜을 먼저 씨아에 넣고 돌리면 틈사이로 통과 하면서 뒤쪽으로 빠져나가고 씨는 굵기 때문에 틈을 통과하지 못하고 앞으로 떨어진다

– 활타기(솜타기) : 씨를 뺀 솜을 대나무를 휘어서 활처름 만든 무명활로 타는데 활 끝의 진동에 따라 솜이 뭉게뭉게 부푼다. 현대에는 타면기를 이용하여 많은 양을 빠른 시간에 솜타기를 한다.

– 고치말기 : 수수깡이나 참대를 가운데 끼우고 솜을 손으로 비비면서 길고 둥글게 말아 빼면 고치가 된다. 이 과정은 솜에서 실을 뽑아내기 위해서 짧은 섬유를 서로 엉퀴게 하는 작업이다.

– 실뽑기(실잣기 물레질) : 고치솜을 둥글게 말아 고치에서 실을 뽑아낸다. 떡가래처름 길게 만 고치를 손가락에 끼우고 처음에는 끝부분의 솜을 인위적으로 꼬아 쪼금 뽑아내어 물래의 가락에 걸어 고정시킨 다음 다른 손으로 물레를 돌려 가락이 회전하면서 꼬임이 주어져 고치의 솜이 실로 이어져 감기게 된다.

– 무명배기(베배기) : 베짜기를 할때 실의 강도를 높이고 엉킴을 방지함으로서 일의 능율을 높이기 위하여 날실에 풀을 먹인 다음 아래에 불을 지펴서 풀이 빨리 마르게하여 도투마리에 감는다. 풀칠하는 솔은 나무의 잔뿌리로 만든 솔을 사용한다.

– 베짜기 : 도투마리를 베틀에 올려놓고 잉아를 걸고 북에 씨실을 달아 날실의 위아래로 벌어진 개구사이로 북을 통과시켜 바디를 당겨서 치며 옷감을 짠다. 이 작업을 하면서 부르는 길삼 노래가 “베틀노래”이다.

 

목화전시실 관람정보
제1전시실 : 물레, 무명이 되기까지의 과정, 면화의 역사, 베틀
제2전시실 : 각종 고유 의상
관람시간 : 09:00 ∼ 18:00(매주 월요일 휴관)

사적지 내에는 시호인 부민후(富民侯)에서 유래한 부민재가 있다.

조선 태종 때 그의 공을 기려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 동지춘추관사 겸 예문관 대제학을 추증하고 강성군(江城君)에 추봉되었으며, 1440년(세종 22)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에 가증되고 부민후(富民侯)에 추봉되었으며 다시 충선공(忠宣公)의 시호를 받았다.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이 부민(富民)이라는 시호로 세종이 봉하였다고 하는데 참으로 적절한 시호라 생각된다. 그의 노력이 결과적으로 백성을 풍요롭게 하였으니 그 공로는 당시로서는 이루 말할수 없는 것이었다.
부민재에는 그의 초상화가 크게 걸려있고, 그의 업적과 생애에 대한 자료들을 볼 수 있다. 또한, 누구나 그에게 참배할 수 있도록 대청에는 자리를 깔아두었다.

산청 문익점 효자비 (孝子碑), 경남 문화재자료 제52호

삼우당 문익점(1329∼1398)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비석이 세워진 곳은 원래 삼우당 문익점(三憂堂 文益漸)선생이 살던 곳인데 그의 효성이 지극하여 모친이 돌아가신 뒤에 시묘(侍墓)살이를 하고 있을 때에 왜적이 침입해 와서 지나는 곳마다 분탕질이 심하여 모두 피난을 갔는데도 오직 선생은 홀로 여막(廬幕)을 지키고 평상시와 같이 곡을 하고 있었더니 흉악한 왜적도 나무를 다듬어 “효자를 해치지 말라”고 써서 세우므로 근처가 모두 평안하였다고 하며, 그뒤 고려 우왕 9년(서기 1383년)에 조정에 정려(旌閭)를 내리면서 이 마을을 효자리(孝子理)라고 명명(命名)하였다. 비의 크기는 세로 160cm, 가로 50c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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