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조계종 해인사 문도회와 산청군이 성철대종사 열반 5주기를 맞이하여 생가를 복원하면서 성철스님기념관을 세워 수행의 정신과 그 가르침을 기리고, 겁외사를 건립하여 종교를 뛰어넘는 선 수행, 가르침, 포교의 공간을 조성코자 했다. 그리하여 2001년 3월 30일 문을 열었다. 생가 겁외사(劫外寺)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장소’라는 뜻이다. 또한 ‘겁외’라는 의미는 윤회의 굴레를 벗어나 완전한 천상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며, 따라서 ‘겁외사’는 ‘유토피아’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산청군 안내자료 참조)
성철스님은 1912년 4월 10일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총명했던 스님은 크면서 책을 많이 보기로 유명했다. 열반 뒤에 발견된 ‘서적기’를 보면 어떤 책을 읽었는지 알 수 있는데 스무살 나이에 행복론,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역사철학, 남화경, 소학, 대학, 하이네 시집, 기독교의 신구약성서 등을 섭렵했다. 배우면서 익히기에도 어려운 책들을 스님은 혼자 배우고 익히며 체득했다.
묵곡리에 대숲과 밤나무숲이 있었는데 스님은 이 숲을 찾아 책 읽기를 즐겼다. 스님이 책을 읽으면서 적은 낙서 중 한 구절이 ‘영원에서 영원으로’라는 글인데 이때부터 아마도 ‘영원’에 대한 철학적 사고를 정립하고 해답을 찾기 위해 고민한 듯 보인다.
그러던 중 성철스님은 우연히 어떤 스님에게서 영가 대사의 [증도가]를 얻어서 읽게 되는데, 이 한 권의 책이 스님의 인생을 바꾸어 놓은 것이다. 스님은 스스로 그 책을 읽는 순간 마치 캄캄한 밤중에 밝은 횃불을 만난 듯 했다고 적고 있다.
맏아들이자 가정까지 이룬 성철스님이 스님이 되겠다고 하자 집안에서는 난리가 났다. 하지만 그는 어머니와 아내를 끝까지 설득, 결국 출가하게 됐다. 인연의 사슬에서 벗어나 ‘참자유’를 찾는 길로 들어선 것이다. 처음 찾아간 절은 지리산 대원사였다.
가정을 꾸린 사람이 들어갈 수 없는 탑전에 자리를 깔고 수행에 들어간 것은 불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집념을 꺾을 수 없었다. 대원사 주지스님의 배려로 그곳에 머무를 수 있었다. 스님은 그때부터 스스로 참선의 길로 정진했다. 해인사에 있던 동산 스님이 그 이야기를 듣고 성철스님을 해인사로 불러 출가를 허락했다. 머리를 깎고 출가하면서 ‘성철’이라는 법명을 얻게 된 것이다.
남다른 정진 수행을 하던 스님은 동화사 금당선원에 이르러 깨달음을 얻고 오도송을 읊게 된다.
[황하수 서쪽으로 거슬러 흘러/곤륜산 정상에 치솟아 올랐으니/해와 달은 빛을 잃고/땅은 꺼져내리도다./문득 한번 웃고 머리를 돌려 서니/청산은 예대로 흰구름 속에 섰네.]
그 뒤 성철스님은 “먼저 깨달은 뒤에 닦는다.”고 한 ‘돈오점수’와는 다른 “깨달음이 이루어지면 닦음도 단박에 이루어진다.”는 ‘돈오돈수’를 이야기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