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안 서산서원과 생육신 조려 유적지

서산서원은 생육신의 충절을 천양하고 덕의를 숭모코자 세운 서원으로, 조려가 은둔 소요하던 백이산 아래에 경상도의 유생 곽억령 등 영남의 선비들이 뜻을 모아 1703년 생육신을 봉향할 서원을 세우고, 서원의 건립재가를 상소하여 윤허를 받아 위패를 모시고 영령을 위로하게 된 곳이다.

생육신 조려 유적지 - 경남 문화재자료 제590호

생육신 조려 유적지는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왕위에 오른 단종이 숙부인 세조에게 왕위를 뺏기자, 이에 비분강개하여 한사람이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절의를 지킨 생육신 경은 이맹전, 어계 조려, 관란 원호, 매월당 김시습, 문두 성담수, 추강 남효온의 충절을 기리고 배향하는 서산서원과 부속 건물인 채미정, 옛터로 추정되는 원동재로 구성된다.

서산서원은 숙종29년 1703년에 창건되고 숙종39년 1713년에 사액되었으며, 고종 8년 1871년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철거될 때까지 생육신을 제향한 곳이며, 1983년에 지금의 위치에 이전, 복원 된 후 지금까지 음력 9월 9일 중양절에 국천재를 지내고 있다. 경내의 건물로는 충의사, 숭의당, 양정당, 상의재 등이 있다.

채미정은 영조11년 1735녀에 서원의 강당 동편 담장 밖에 진은 건물로 어계 조려선생이 일찍이 읊은 구일등고시를 백이와 숙제의 채미가에 비유하여 이름을 지은 것이다. 서산서원이 이전, 복원되기 전까지 생육신의 향사를 지내던 곳이다. 

원동재는 서산서원으 예 터로 추정되는데, 지금의 위치에서 약 50m 거리에 있는 원동재에서 뒤편 대나무 숲과 채미정까지 옛 터에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생육신 조려 유적지는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킨 생육신에 대한 향사를 지속적으로 거행하고 있는 상징적 공간으로 생육신의 역사적 삶이 교훈으로 남을 수 있도록 경상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하여 보존하고 있다.

서산서원 - 경남 문화재자료 제590호

서산서원은 생육신의 충절을 천양하고 덕의를 숭모코자 세운 서원으로, 조려가 은둔 소요하던 백이산 아래에 경상도의 유생 곽억령 등 영남의 선비들이 뜻을 모아 1703년 생육신을 봉향할 서원을 세우고, 서원의 건립재가를 상소하여 윤허를 받아 위패를 모시고 영령을 위로하게 된 곳이다.

숭의문은 서원 초입에 세워져 있는 외삼문으로 주출입문이며, 서원의 전면은 강당을 중심으로 한 강학공간, 후면은 사당을 중심으로 한 제향공간이 있는 전학후묘의 배치이다.

강학공간인 강당은 숭의당을 중심으로 동재와 서재인 양정당과 상의재로 구성되어 있으며, 강당인 숭의당은 서원을 대표하는 가장 큰 규모의 건물이며 기능적으로 유생들이 공부하는 공간이다. 동재인 양정당은 헌관의 숙소로, 서재인 상의재는 유생의 숙소로 사용되었다.

제향공간인 사당 건물은 충의사를 중심으로 좌측의 소청각은 생육신의 유물을 안치, 보관하는 곳이고, 우측의 전사청은 제사를 준비하고 제기와 제수를 보관하는 곳이다.

상의재(서재)
숭의당
양정당(동재)

고려 전서공 금은 조열선생 신도비

선생은 함안조씨로 시조인 고려대장군 원윤공 조정의 9세손으로 고려말기 공조전서(현, 상공장관)의 벼슬을 지냈으며 조선태조 이성계의 등극으로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킨 고려말의 충신이다. 선생은 특히 거문고와 그림에 뛰어난 당대의 이름난 금화가로 달밝은 밤에 거문고를 타면 소리가 수리에 들렸다.

고려말 공양왕 3년 선생은 왕에게 [시중이단(이성계)의 부자가 비범한 지용을 겸비하여 토적의 명분으로 원주에 유진하면서 뜻은 벌군(임금을 침)에 있으니 속히 병권을 거두어 사직을 보존하라]고 3일간을 상소하고 10여차 면간하였으나 힘을 잃은 왕은 용단을 내리지 못하고 도리어 충신들을 축출하여 조열은 함안으로 이색은 한산으로 길재는 선산으로 돌아갔다.

선생은 이시중이 공양왕을 폐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호천하고 홍재, 조승숙(덕곡공), 길재 등과 함께 두문동에 이르러 국사회복을 꾀했다.

이태조가 등극하여 한양궁 준공경연에 선생을 초청하여 거문고를 타도록 청하였으나 선생은 [수대로 왕씨의 녹을 먹은 조전서가 어찌 이왕과 함께 즐길수 있겠는가]하고 사양하였다.

황희와 권근 등이 [조전서의 절개를 굽힐 수 없으니 공경히 돌려 보냄만 같지 못하겠습니다.]하여 돌려 보냈다.

이해 이왕이 공양왕을 시해하므로, 제인과 더불어 시신을 거두어 장사하고 3년 동안 복상아였다.

이곳에 조선조 참판 이채가 쓴 선생의 충절을 기린 신도비가 서 있다.

서원 관련 자료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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