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의장군 곽재우의 유적과 정암진 주변

의병장 곽재우의 흔적이 묻어있는 의령 정암진과 남강하류를 둘러본다.

하늘이 내렸다는 의병장, 홍의장군 곽재우 장군의 전승지 정암진 일대를 이틀에 걸쳐 둘러보았다. 의령에 들어서면 초입에 의령관문이 상당히 위압적인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한다. 이 강, 남강을 건너지 않고는 의령에 들수 없고, 의령을 지나지 않고는 호남으로 향할 수 없다.

정암진과 정암진 전투의 현장 의병광장과 의령관문공원

정암진 전투는 1592년 음력 5월 24일 최초로 의병이 일본군과 싸워 승리한 전투로 이 승리로 일본군의 전라도 진격을 막고 곽재우의 의병을 중심으로 의병들이 규합되었다. 경상도 의령 남강변에 위치한 정암진은 일본군들이 진주를 거쳐 호남쪽으로 진출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곽재우가 지휘하는 의병은 7월 4일 일본군 정찰대가 밤에 표시해 두었던 푯말의 위치를 옮겨서 일본군을 공격하기 좋은 지점으로 유인하고 다음날 새벽에 푯말을 따라 이동하던 일본군을 기습했고, 강변의 습지에 발이 묶인 일본군은 큰 피해를 보고 물러났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곽재우 장군이 진을 치고 왜군을 몰아내었던 정암진 일대인 의령관문공원에는 성을 복원하고 언덕에는 의병광장을 조성해서 장군의 의지를 기리고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정암진 승전도와 곽재우 의병장과 17장군 부조

의병광장에는 곽재우 장군의 동상과 정암진 전투의 승전을 기념하는 부조가 새겨져 있고, 이 전투에 참여했던 장군들을 부조로 새겨두었다. 정암진 승전도에 대한 안내판의 내용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서기 1592년 임진년 5월말 왜장 안국사혜경이 왜군의 주력 부대를 이끌고 전라도 침공을 위해 그 길목인 정암진을 도하하기 위하여 장군의 의병과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였는데 장군은 늪지와 절벽으로 된 강 언덕 지형을 이용하여 신출귀몰한 유격전으로 왜군의 침략을 저지하고 격퇴하고 왜군의 전라도 침입로를 차단하였으며 그 후 왜군은 다시 정암진을 침입하지 않았다.

이곳이 의병전 사상 유명한 홍의장군 승전지 정암진 전투였다. 정암진 전투는 단순한 왜군 격파뿐만 아니라 주요 수송로인 낙동강 수로를 차단하고 왜군의 전라도 침공을 미리 저지하는 한편, 우리군상에게 승리의 자신감을 안겨준 런략적인 의미를 가진 승전이었다.

망우당 곽재우 장군 동상과 자필 시

의령에서는 약간의 공간이 확보되는 개활지에서는 입구의 곽재우 장군 동상이 눈에 들어온다. 의령에는 사실의 걸출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된 곳이다. 호불호가 있을 수 있으나 곽재우 장군은 일본인을 제외한 모든 이들의 존경을 받으니 의령군으로서는 의령의 상징인물로 삼는데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인다. 선조실록에는 “의령에 사는 고 목사(牧使) 곽월의 아들인 유생 곽재우는 젊어서 활쏘기와 말타기를 연습하였고 집안이 본래 부유하였는데, 변란을 들은 뒤에는 그 재산을 다 흩어 위병을 모집하니 수하에 장사들이 상당히 많았다. 가장 먼저 군사를 일으켜 초계의 빈 성으로 들어가 병장기와 군량을 취득하였다”라고 적있다고 한다. 이 의병광장에는 그가 쓴 시가 바위에 새겨져 있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詠懷(영회) – 내마음을 읊다

平生慕節義(평생모절의)   평생 토록 절개와 의리를 사모했건만

今日類山僧(금일류산승)   오늘에야 산속의 승려가 되었구나.

絶粒無飢渴(절립무 기갈)  곡기를 끊어도 주림과 목마름이 없고

心空息自凝(심공식자응)   마음을 비우니 조식(調息)이 절로 이루어 지네

 

정암과 정암나루 그리고 광활한 남강의 습지

정암의 ‘정(鼎)”자는 세발 달린 솥을 뜻한다. 이 정(鼎) 자는 정보(鼎輔)-삼정승, 정갑(鼎甲)-과거시험에 최우등으로 급제한 세 사람과 같이 3을 뜻하는 데에 사용되었으며, 풍수에서도 ‘정(鼎)’은 재물을 상징한다고 하여, 이곳 정암의 반경 20리 안에 3명의 큰 부자가 난다고 하였다 한다. 

의령 사람들은 이 전설이 실현되었다고 믿고있다. 즉, 삼성그룹 창업자인 고 이병철 회장의 출생지가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솥바위에서 8㎞)이고, LG그룹 고 구인회 회장은 진주시 지수면(7㎞)에서 태어났고, 효성그룹 고 조홍제 회장은 함안군 군북면(5㎞)이 고향이며, 이들 세 사람은 삼성(三星), 효성(曉星), 금성(金星, LG 창업 당시 이름) 등 기업 이름에 모두 ‘별 성(星)’자를 썼다. 또한, 이병철 회장은 호암(湖巖), 구인회 회장은 연암(軟巖)이란 호를 써 정암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정암 옆에는 꽤 큰 규모의 암반이 있는데, 이곳에는 배를 정박하기에 적당하고 충분해 보였다. 그야말고 자연발생적 나룻터가 만들어져 있다. 이곳이 주요 남강을 통한 주요 물자를 수송하는 핵심 수송로였음을 짐작케 한다. 또한, 광활한 남강하류의 완만한 강변은 습지가 형성되어 사람이 건널 수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제방을 쌓고 강변을 정비한 상태이지만 예전에는 거야말로 광활한 넓이의 습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 정암이 있는 정암나루가 아니고는 강을 건널 방법은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정암나루터 바로 옆에는 정암철교가 놓여있다. 이 다리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기술자들이 만들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차량의 이동은 불가하고 사람과 자전거와 오토바이 정도만 건너다니고 있다. 이곳에는 곽재우장군과 정암전투에 대한 소개도 있고, 정암나루에서 불려지던 아래와 같은 배사공 노래도 전해 온다고 한다.

 

정암에 사공아 뱃머리 돌려라/우리님 오시는디 마중을 갈거나
너이가 날같이 사랑을 준다면/까시밭 천리라도 맨발로 갈거나
간다 못간다 얼매나 울었던고/정거장 마당이 한강수 되노라
(후렴) 아이고 되이구 뚜댕구 뚜댕구 성화가 났네 흥~

 

정암진 전투 승전 지휘소, 정암루

정암루는 정암교 옆의 언덕위에 위치해 있다. 정암루는 곽재우의 정암진전투 지휘소였다. 조선 중기에는 이 곳에 취원루(聚遠樓)가 있었다는데 소실되었고, 1935년 지역유림에서 세운 정암루는 6·25 전란때 불에 탔다. 지금의 것은 1953년 지방 유지들이 재건한 것이라고 한다. 

깔끔한 남강 제방은 자전거 도로로 활용되고 있다.

자전거길에 세워진 팻말에는 남강댐까지 59km, 낙동강 합류점까지 30km 거리라고 되어 있다. 그러니 남강댐에서 낙동강까지의 거리가 90km정도 되고 의령이 2/3 정도의 지점이 되는 모양이다.(옥의티, Nakdonggang을 Nakdobggang라 표기했다) 

드넓은 고수부지에는 농사도 짓고, 공원도 조성되어 있다.

의령지역 남강 고수부지는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물을 담는 습지 또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광활하다. 고수부지에는 어느 기관인지 아니면 어느 개인인지는 모르지만 대규모로 벼농사를 짓기도 하고 엄청난 규모의 하수오 밭도 조성되어 있으며 잔디 재배장도 큰게 있다. 엄청난 부지를 방치해 두는 것 보다는 이렇게라도 활용하는 것이 좋아 보인다. 여기서 좀 더 나간다면 이런 광활한 습지자원을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찾는 것도 필요해 보인다. 예를 들어 카누를 이용한 습지체험 같은 프로그램을 개발한다든지…

서쪽하늘 어딘가로 긴긴 여름해도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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