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 세병관, 충렬사 그리고 동피랑

2019년 12월 8일 날씨도 깔끔하고 해서 아침부터 달려 통영으로 향했다. 통영에서는 아무래도 예전에 들려보았던 세병관과 충렬사 그리고 동피랑을 둘러보았다. 통영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발자취가 산재해 있다. 그 흔적들만 쫓아도 며칠이 걸릴 것이다. 하루 휙 돌아보는 정도로는 겉모습만 훑어 볼 뿐이다.

삼도수군통제영은 사적 제402호(1998.2.20 지정)로 1604년 설치되어 1895년에 폐영될 때까지 전라,충청,경상의 3도 수군을 지휘하던 본부였다. 임진왜란 때 제1대 수군통제사로 임명된 전라좌수사 이순신 장군이 한산도에 설치했던 본부가 최초의 통제영이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떠난 정유재란 이후 여러 곳으로 옮겨져 지금의 통영시 두룡포에 자리를 정했다. 1604년 제6대 통제사 이경준이 부임한 뒤, 제209대 통제사 홍남주 까지 무려 290년간 왜적에 대비하는 조선수군의 총본부로서 오늘날의 해군사령부와 같은 곳이었다.

1998년 2월에 사적으로 지정되어, 사라진 건물들에 대한 복원계획을 수립하고 운주당, 백화당, 병고, 중영청, 산성청, 12공방 등의 건물들을 복원하였다. <현지 안내판 참고>

통영 세병관 (국보 제305호, 2002.10.14 지정)

세병관은 1963년 10월 24일 해체수리시 종도리의 홈 속에서 발견된 세병관중수상량문에 을사년(서기 1605년) 1월에 짓기 시작하여 그해 가을 7월14일에 상량했다고 기록되어 있는 통제영의 중심건물이다. 이 건물은 창건 후 약 290년 동안 3도(경상·전라·충청도) 수군을 총 지휘했던 곳으로 그 후 몇 차례의 보수를 거치긴 했지만 아직도 멀리 남해를 바라보며 당시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앞면 9칸·옆면 5칸 규모의 웅장한 건물로,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건물 내부 바닥에는 우물마루를 깔았는데, 중앙 뒷면에 약 45㎝ 정도 높은 단을 설치하여 궐패(闕牌)를 모시는 공간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그 위로 홍살을 세웠고, 후면 내진주열 중방 하부에는 머름을 설치하여 분합문을 달고 중방 위로는 판벽으로 마감하여 무인도(武人圖)를 그렸으며 천장은 소란반자를 설치하였다.

세병관은 17세기초에 건립된 목조단층 건물로 경복궁경회루(국보 제224호), 여수 진남관(국보 제304호)과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건물에 속하고, 여수 진남관과 더불어 그 역사성과 학술적·예술적 가치가 크다.

세병관은 통제영의 객사로 제6대 통제사 이경준이 이곳에 통제영을 옮겨온 이듬해인 1605년에 처음 세웠다. 제35대 통제사 김응해가 1646년 규모를 크게하여 다시 지었으며, 제194대 통제사 채동건이 1872년에 다시 고쳐 지은 것이다.

세병이란 만하세병에서 따 온 말로 ‘은하수를 끌어와 병기를 씻는다’는 뜻이다. ‘세병관’이라 크게 써서 걸어 놓은 현판은 제137대 통제사인 서유대가 쓴 글씨이다. <문화재청 홈페이지와 현장의 안내판을 참고하였음>

본영군, 통제영

통제사가 제반 의전을 치르던 중심영역으로, 통제영 영역 내에서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세병관은 통영시의 언덕위에서 남해를 바라보며 있다. 그 거대한 규모에서 보여주는 위압과 권위는 이 건물이 승전에 대한 기념성과 군사적 기능이 동시에 추구되었다는 추론을 가능하게 한다. 구성을 살펴보면, 전면에 내삼문인 지과문 외삼문인 망일루가 있었다. 백화당으로 통하는 협문과 뜰 안에는 석인, 기삽석통이 있다. 좌측에는 백화당과 잉번청이 있다. 석인은 숙종 27년(1701년) 제77대 류성추 통제사 때 세병관 뜰에 액막이로 만든 석인으로 추측되며, 세병관 앞 장대석 석축 해체과정에서 석인 5기가 발굴되어 현재의 위치에 설치하였다고 한다. <현장 안내판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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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당과 12공방

백화당은 선조 36년(1603) 제6대 이경준 통제사가 건립하였다. 중국 사신 등의 손님들을 맞이하는 통제사의 접견실이자 비장청인데, 비장은 지방장관 및 중국사신을 수행하던 무관으로 민정의 염탐과 같은 업무도 맡았으며 지방장관이 임의로 임명하였다.

12공방은 제반 군기와 진상품을 생산하였던 곳으로, 백화당 서쪽에 자리하며, 군수품 생산과 민생에 필요한 물품은 물론 조정에 진공품과 때로는 중국 가는 사신의 헌상품까지도 조달하는 조직적인 분업의 군영 공방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임진왜란 초기 변방에서 각종 군수품을 자체 조달목적으로 이순신 장군이 한산진에서 시작하였으나(1593년) 임진란 이후 통제영이 창성하자 크게 번창하여 다양한 생활용품까지 생산했다.

<현장 안내판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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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제영 비석군, 두룡포기사비, 매몰비석군

통제사비군은

역대 통제사들의 공덕을 기리는 비석이 시내 일원에 흩어져 있던 것을 현 위치에 모아서 동향으로 58기를 4줄로 나란히 세워 놓은 것이다. 이 통제사비군은 통제사가 부임하여 임기를 마치고 퇴임한 후에 이 지방 군,관,민이 세운 일종의 송덕비인데, 표제도 송덕비, 추사비, 거사비, 사적비, 불망비, 타루비, 유애비, 선정비 등으로 다양하다.

두룡포기사비(경남유형문화재 제112호, 1974.12.28 지정)

두룡포에 삼도수군통제영을 설치한 제6대, 제9대 이경준 통제사의 치적을 기록한 ‘이경준사적비’로 인조 3년(1625년)에 제19대, 제25대 구인후 통제사가 세웠다. 두룡포는 원래 작은 포구에 지나지 않았으나 이경준이 이곳에 삼도수군통제영을 옮겨옴으로써 전략적인 요충지가 되었다. 이 비석은 받침대 없이 비신과 머릿돌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비문은 창원대도호부의 부사였던 박홍미가 지었다. 비문은 아랫부분이 마멸되어서 판독이 어려운 부분도 있으나 대체로 그 내용은 확인된다. 비문에는 이 비를 세우게 된 경위와 함께 통제사 이경준의 약력과 업적 등이 기록되어 있다. 머릿돌에는 두 마리의 용이 하늘을 오르며 하나의 여의주를 물고 있는 모습이 생동감 있게 조각되어 있다. 이 비석은 원래 통제영의 영문 자리에 세웠던 것을 1904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왔다.

매몰비석군

매몰된 비석 24기는 전의 이씨 문중이 배출한 삼도수군통제사 14명 중 9명의 것이다. 2014.11.7 통영시 무전동 873번지에 묻혀있던 것을 발굴하였는데, 이는 이례적인 일로 매몰 이유도 불명확하다. 내용적으로는 사적비, 청덕선정비, 영세불망비가 각각 5기, 거사비,선정비,유애비,유애거사비가 각각 2기, 불망비가 1기이다.

<현장 안내판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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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

거북선은 고려 말 또는 조선 초부터 이미 제조, 사용되었으나 임진왜란 당시 왜구의 격퇴를 위하여 충무공 이순신에 의해 돌격선으로 특수하게 제작 실용화 된 전선이다.

‘선조수정실록’에서는 아군의 병력을 보호하고 적의 접근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면서 적진을 휘젓는 돌격선으로서의 거북선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이에 앞서 이순신은 전투 장비를 크게 정비하면서 자의로 거북선을 만들었다. 이 제도는 배 위에 판목을 깔아 거북 등처럼 만들고 그 위에는 우리 군사가 겨우 통행할 수 있을 마큼 십자로 좁은 길을 내고 나머지는 모두 칼,송곳 같은 것을 줄지어 꽂았다. 그리고 앞은 용의 머리를 만들어 입은 총구멍으로 활용하였으며, 뒤에는 거북의 꼬리를 만들어 꼬리 밑에 총구멍을 설치하였다.

좌우에도 총구멍이 각각 여섯 개가 있었으며, 군사는 모두 그 밑에 숨어 있도록 하였다. 사면으로 포를 쏠 수 있게 하였고 전후좌우로 이동하는 것이 나는 것처럼 빨랐다. 싸울 때에는 거적이나 풀로 덮어 송곳과 칼날이 드러나지 않게 하였는데, 적이 뛰어 오르면 송곳과 칼에 찔리게 되고, 덮쳐 포위하면 화총을 일제히 쏘았다. 그리하여 적선 속을 횡행하는데도 아군은 손상을 입지 않은 채 가는 곳마다 바람에 쓸리듯 적선을 격파하였으므로 언제나 승리하였다.

-‘선조수정실록’ 1592년(선조 25) 5월 1일의 기사내용-

<현장 안내판 참고>

전라좌수영 거북선
통제영 거북선

통영 문화동 벅수(중요민속자료 제7호, 1968.11.23)와 동피랑

통영에서 최근 새롭게 떠오른 동피랑 벽화마을, 전국적인 벽화마을 붐을 일으킨 현장이다. 그 초입에 있는 문화동 벅수가 인상적이다. 

벅수(장승)는 나무나 돌의 상부에 신장상이나 귀면의 형상을 그리거나 조각하고, 하부에 신장명이나 이정을 새긴다. 벅수는 전라남도와 경상남도 해안지방에 널리 분포되고 있다. 이 돌벅수는 마을의 전염병과 액운을 막기 위한 비보장승으로서, 동남방이 허하다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광무 10년(1906년) 세병관 입구인 이곳에 벅수계를 만들어 세운 것이다. 

화강암으로 만든 벅수 뒷면에 ‘광무 10년 병오 8월생 동락동립’이란 문구가 음각되어 있다. 이것은 주술적 민속 조각품으로 우리나라 돌장승 중 유일한 채색장승으로 U자형으로 벌린 입과 입 밖으로 솟아난 두개의 송곳니가 요물스런 귀신을 막아내는 성격을 잘 나타내고 있다.

벅수의 높이는 198cm이고, 둘레는 160cm이다.

<현장 안내판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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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 충렬사(사적 제236호)

조선시대 선조의 명에 따라 제7대 통제사 이운룡이 1606년 세웠으며, 해마다 봄, 가을 두 차례 충무공 이순신의 제사를 올리고 있는 곳이다.

1663년에 현종은 홍살문을 다시 세우게 하고 ‘충렬사’라는 이름을 내려 현판으로 걸게 하였다. 제70대 통제사 최숙이 1695년에 경충재를 세워 서원을 열고 충무공 정신을 계승하고자 인재를 키웠으며 또한 숭무당을 짓고 장교 세 사람을 주재시켜 이충무공의 제사와 충렬사의 관리를 담당하게 하였다. 1795년에는 정조가 ‘충무공전서’를 발간하여 이곳에 보관하게 하였는데, 현재까지 전하고 있다.

통제영이 폐영되자 고장의 유지들이 충렬사영구보존회를 결성하여 이충무공의 제사를 모시며 충렬사를 관리해 왔다. 현재는 (재)통영충렬사에서 관리하고 있다.

 

<현장 안내판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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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사 팔사품 일괄(보물 제440호)

통영충렬사 팔사품은 중국 명나라의 신종이 충무공 이순신(1545~1598)에게 보내온 8종류의 의장물이다. 정유재란 때 조선을 도왔던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이 이충무공의 뛰어난 전략과 빛나는 전공을 보고하자, 지휘관의 권위를 상징하는 8종류의 물품을 보내어 주었다.

통열충렬사 팔사품은 도독인 1개, 호두령패 2개, 귀도, 참도 각 2자루, 독전기, 홍소령기, 남소령기 각 2폭, 곡나팔 2개 등 모두 8종류 15점이다.

 

<현장 안내판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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