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양호와 수몰지의 흔적

revised at  2018-11-11, 2020-11-15, 2020-11-19, 2020-11-29, 2020-12-01  

좋은 피사체를 찾아 먼곳을 헤매고 다녀도 깊이 있는 사진을 찍기는 어렵다. 단지 남들을 따라해 보는 것 뿐... 가까운 진양호도 찾으면 좋은 피사체도 많고, 수몰지의 흔적을 찾아서 기록으로 남기는 것도 의미있을 것이다.

요즘 몇 주 정도 아침운동 삼아 진양호 언저리를 돌아다니고 있다. 며칠 전에는 호숫가 얕은 곳에 살얼음이 얼기도 했었다. 호숫가라 그런지 아침 서리가 하얗게 내리고, 멀리 지리산은 구름이 벗겨지면서 하얀 상고대를 덮어 쓰고 있는 천왕봉의 자태를 드러내기도 한다. 앞으로는 틈나는 대로 진양호 구석구석을 찾아서 사진도 찍고 환경의 변화도 살펴서 기록해 보고자 한다. 특별히, 중요한 일은 아닐지라도 언젠가는 누군가에 의해 사용될수도 있는 자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진양호는 대평면을 삼켰다.

진양호가 건설되면서 대평면은 거의 사라지다시피 하였다. 지도에서 보는바와 같이 대평면의 비옥한 들판은 거의 대부분 호수에 수몰되고 없다. 이제는 옥토에 터잡고 살던 사람들은 지도의 오렌지색 원 표시지역에 조성된 이주단지 등 여러곳의 이주단지로 흩어져 살고 있다. 새로 조성된 대평지구는 더 넓게 펼쳐진 논밭에 딸기하우스 단지를 조성해서 대평딸기를 수출작목으로 발전시켰다.

진양호(晉陽湖)는 1970년 7월에 완성된 낙동강 유역 최초의 다목적댐인 남강댐의 건설로 형성된 호수이며, 지리산에서 발원하는 덕천강과 남덕유산과 지리산에서 발원한 경호강(남강)이 만나는 곳에 위치하며, 진양호는 진주시의 주요 식수원이다. 호수의 이름은 진주시의 옛 이름인 ‘진양(晉陽)’에서 따왔다.

진양호는 일제강점기인 1936년에 방수로를 포함한 진양호 공사를 착공했다가 중단했고, 1949년에 착공했다가 한국전쟁으로 중단한 뒤 1962년에 착공하여 1969년에 준공하였고, 1989년에 보강공사에 착수해 1999년에 다목적댐으로 준공되었다.

진양호는 면적이 23.55 km2, 만수위는 37.5m의 콘크리트 중력댐이다. 총저수량은 1억 800만톤이었으나, 1999년에 남강댐 보강공사로 3억 1000만톤 규모로 늘어났다.
연간발전량은 4,000만 kW에서 4,130만 kW이다. 1981년 8월 6일 도시자연공원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호수 속의 대평지구

물에 잠긴 호수 속이 고향인 사람들도 많겠지만, 호수의 아침은 잔잔하고 고요하다. 진양호 호반도로를 달려보면 진양호의 맨 북쪽 지역에 대평지역 이주단지가 있고, 청동기문화박물관도 조성되어 있다. 대평교 다리 옆에는 어디서 보아도 배의 선수부분(선박의 앞쪽)을 형상화한 것같은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다. 마치 물속에 잠긴 고향마을을 이 배 타고 다녀오고 싶은 고향잃은 실향민들의 마을을 대변하는 것 같아 마음 한켠이 짠하다.

이 전망대에 올라 눈을 감고 상상해 본다. 망망대해 같은 호수 아래에는 이곳 마을 사람들의 삶의 흔적이 잠겨 있을 것이다.

이 드넓은 대평 들판이 물에 잠기고, 논길과 밭길이 사라지고, 마을 언덕과 앞동산, 뒷동산이 물위에 간신히 고개를 내밀고 있으니 이들이 이제는 외로운 섬이되어 지나는 철새들의 쉼터가 되기도 하고, 물속에서는 물고기들의 산란처가 되기도 하고, 홍수로 떠내려온 나무나 풀들이 뿌리내릴 수 있는 터전이 되기도 한다.

수위가 올라가면 물속에 잠기고, 수위가 내려가면 물위에 떠올라 섬이 되기를 반복하면서 특이한 생태와 환경을 만들어간다. 주변에는 말라 죽은 나뭇가지들이 물위에 빼꼼히 고개를 쳐들고 있는 안타까운 모습들이 수없이 많다. 이들이 죽고 그 터전에 새로운 생명을 싹틔우기를 반복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가 아닐까 한다. 물속이라는 무서운 환경에서도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 새를 부르고, 가을이 되면 잎을 물들여 떨구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지리산에서 발원한 물길따라 흘러온 맑고 시린 물이, 함께 내려온 지리산의 아침 골바람에 부디쳐 잔잔한 물결을 만들고, 이들의 에너지가 모이고 모여서 호수의 뚝방을 때리며 내는 철썩이는 소리가 간혹 들리기도 한다. 가끔씩 놀란 오리들이 무거운 몸통을 날리기 위해 힘써 도움닫기 하는 소리가 요란하기도 하다.

대평 이주단지와 청동기문화박물관

대평면(大坪面)은 남강댐 2차 보강공사로 1998년 10월 면소재지가 새로운 준도시 지역으로 조성되었는데 계획도시로 조성된 도시라서 정비가 잘 되어 있다. 진주시내에서는 약 20km에 위치하고 있고 진양호 순환도로로 연결되어 있으며, 20여년 전부터 대평딸기특화단지로 조성하여 딸기를 수출농업으로 발전시키는 등 근교 시설농업 지역이 되었다. 

마을 앞에는 진주청동기문화박물관이 있는데, 요즘에는 보수공사가 한창이다. 1967년 남강댐 건설 과정에서 선사시대 유적의 분포가 알려졌고, 1995년 진주시 대평면, 산청군 단성면, 사천시 곤명면 등에서 청동기 유물이 대량으로 발견되었고 이후 소중한 문화유산인 유물을 잘 보존하고 관리하기 위해 2009년 진주청동기문화박물관이 개관하였다 한다.
진주청동기문화박물관은 우리나라 유일의 청동기시대 전문박물관으로 진주 남강유역 청동기시대의 발달된 문화상을 살펴볼 수 있는데, 1층 입체영상관, 2층 상설전시실, 야외에는 청동기시대 마을을 재현하고 있다.

명석면 가화리 지역

통영-대전간의 고속도로를 타고 진주로 들어오다 보면, 서진주 IC를 약 2km정도를 남기고 약간 긴 교량이 나타난다. 이 교량에서 우측을 보면 직선으로 저 멀리까지 호수가 이어져 있다. 어찌보면 큰 강물 같기도 하지만, 수량이 많은 것으로 보아 호수의 한 부분임은 틀림이 없다. 높은 교량 위에서 스쳐가며 잠시 보는 장면이지만 볼때마다 인상적이다. 계절에 따라, 시간에 따라, 출장의 목적이 잘 되고 못 되고에 따라 그 풍광은 달리 보인다.

2020년 11월 15일 아침, 나는 항상 궁금하던 그곳을 찾아 서진주IC 뒷쪽으로 나있는 지방도인 판문로를 따라 우수리 방향으로 가다가 영건재를 지나 마을 4거리에서 왼쪽으로 꺾어서 가화로로 접어 들었다. 4거리에서 500여m를 가면 고속도로에서 통과했던 교량이 나온다. 이 교량 아래 적당히 주차하고 주변을 둘러보면, 언덕방향으로는 곳곳에 농장들이 조성되어 있고 호수 방향에는 야생동물보호 관리초소도 있다. 이곳에서 보는 조망은 마치 노르웨이의 여느 피요르드를 보는 듯하다.

가을 단풍이 적당히 물속에 반영을 보이고, 호수는 잔잔하다. 노을이 좋은 여름날 저녁시간대에 다시 찾으면 좋은 그림을 얻을 것 같기도 하다. 삼각대를 설치하자 오리 등 야생조류들은 멀찌감치 거리를 형성하고 경계모드에 돌입한다.

 

고속도로 교량에서 100m 정도 더 가면 교량의 반대편 부분 아랫쪽이 옛 마을이였던 모양이다. 곳곳에 담장의 흔적도 있고, 골목길의 흔적도 있고, 집집마다 심었던 감나무나 대추나무 등의 잔해들이 널려있다. 여기서 조금 더 가면 수위가 높을 때는 잠기겠지만 평소에서 수변습지 상태로 있는 옛 마을 터가 있다. 직접 들어 가 보면, 습지에서 왕성하게 자라는 왕버드나무 숲을 이루고 있지만, 차량이 다니던 도로의 흔적도 있고, 공터의 흔적, 그리고 개울의 범람을 막기위해 자연석으로 축대를 길게 쌓아 제방을 만들고, 제방 사이에 시멘트로 다리를 놓았는데 철제 난간은 삭아서 덜렁거리지만 아직도 튼튼하여 건너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다. 아마 여기 어디쯤에 빨래터도 있었을 것이고, 물레방아도 있었음 직하다. 여기서 200여m를 더 가면 현재의 가화리 마을도 있고, 가화리 마을회관도 있다.

명석면 오미리 시목마을

국도 3호선을 타고 산청방향으로 가다보면 오미마을이 있는데, 이곳은 예전의 오미마을이 있고 길 건너 언덕에는 이주민을 위한 시목마을이 조성되어 있다. 옛 시목마을은 물에 잠겨 모두 떠나거나 이곳 이주마을에 다시 터를 잡고 살고 있다.

나의 처가는 옛 시목마을에 살다가 대구로 이사를 갔지만, 장인의 형제들은 수몰지구로 지정되면서 보상을 받고 모두 진주시내로 이사하여 살고 있다.  옛 시목마을을 찾아가려면, 이곳 오미마을에서 진양호 호반길로 접어들어 얼마 못가서 시목교라는 조그마한 교량을 만나게 되는데, 이 교량을 건너자마자 바로 오른쪽으로 꺾어 200여m 들어가면 시목마을 터가 있다. 마을이 있던 자리에는 물이 들어차 있고, 예전에 오미리에서 대평면으로 버스가 다니던 길이 있었는데, 마을 앞 강을 건너던 시멘트 다리가 잠길듯 말듯 간신히 버티고 있다. 물이 간당간당하는 도로를 따라 자생으로 자라 가로수를 형성하고 있는 왕버드나무들이 제법 고목의 포스를 풍기며 아침햇살을 받아 반짝인다.

이 시목마을은 처가인 평산신씨가 대대로 살던 집성촌이였다. 마을 사람은 모두가 친지이다. 딸을 낳으면 외지로 시집 보내고, 아들이 장성하면 바로 옆에 집을 지어 분가시키고, 또 그 아들의 아들이 장성하면 그 옆에 집을 짓고 분가하였으니, 옆집 아이는 사촌이요, 그 옆집에는 6촌이 살고, 삼촌에 당숙에 재당숙에 얽히고 설킨 친지들의 집합인 집성촌이다. 이곳이 바로 그 평산신씨들의 집성촌이였다. 

마을 터에 들어서면 “시목마을터”라는 표지석도 있고, 조금 안쪽으로 가면 “평산신씨세거지”라는 표지석이 큼지막하게 세워져 있다. 아담한 마을, 물길따라 조성된 비옥한 마을, 수백년을 대를이어 삶의 터전을 가꾸어왔던 마을 사람들 즉, 친지들은 정부가 쥐어주는 크고 작은 보상금을 움켜쥐고 뿔뿔이 흩어져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떠났다. 나의 처가는 장인이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수몰 이전에 대구로 이사를 갔고, 남아있던 처백부와 처삼촌은 진주시내로 이사했다. 집사람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나는 집사람이 어린시절을 보낸 이곳을 자주 찾는 편이다. 마을 뒷산에 있는 장인 산소의 벌초도 가능하면 내가 직접 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오랜만에 찾은 시목마을은 흔적만 남아있고, 마을을 삼킨 물에서는 물안개가 피어오르며 아침햇살을 시각화시켜 우리 눈에 보여준다. 황망히 고향을 떠난 마을 사람들은 아마도 저 물안개 속에서 옛집과 그기서 있었던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갈 것이다. 2018-11-11

 

연로하신 장모는 새댁시절을 보낸 이곳 시목마을에서 있었던 일들을 요즘들어 부쩍 자주 말씀하신다. 대충 정리해 보면 이렇다. 지금은 진양호에 수몰된 내동면 내평리 쯤 되는 것 같은데, 안뜰마을에서 3남 1녀의 외동딸로 태어나셨는데, 면장을 지내신 부친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귀하게 자라셨다는 것을 늘 강조하신다.  팔자가 사나와서 장인이 일찍 돌아가셨다고 한탄하시지만, 청상이 되어서도 1남 2녀의 자녀를 제대로 키우신 대단하신 분이시다.

시목마을에서 살림을 시작하신 장모는 큰집 옆에 새로 집을 짓고 분가를 하셨고, 나중에는 삼촌이 그 옆에 집을지어 분가를 해서 3형제가 나란히 담장을 끼고 사셨다고 한다. 처조부께서는 못미더운 3형제를 옆에 두고 아침 기상부터 논일, 밭일, 살림하는 것 까지 직접 챙기셨다고 한다. 밤이되면 아궁이에는 청솔가지를 잔뜩 쑤셔 넣고 밤새 타게 해 놓고는 또래의 처녀 총각 이웃이자 친지들이 좁은 방에 가득모여 화투놀이로 밤을 새웠다고 한다.

인근에는 포수가 둘이 있었는데 장인은 명포수요 새터에 사는 집안사람인 우체국장은 헛포수라 했다하니 장인은 여러모로 재주가 많으셨던 모양이다. 당연히 마을 앞에 강이 있으니 통발에 그물질을 해서 수렵에도 능하셨다고 하는데 우리 집사람의 손재주로 봐서는 약간의 과장이 있지않나 싶다. 장인은 처조부의 논일과 밭일의 배정이나 보상체계 그리고 간섭에 불만이 많으셔서, 어떻게 해서라도 도회지로 나갈 요량으로 대구에 사시는 누님를 자주 찾아 가셨고, 돈도 열심히 모으셨다고 한다. 장인의 구두쇠 같은 절약에 살림을 해야하는 새댁은 몰래 쌀독의 쌀을 퍼내서 봇짐장수와 거래를 하다가 들켜서 혼이 나는 일도 많았다 한다. 귀하게 자란 새댁이  꾸미고, 바르고, 애기들 입히고 등등 하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이 얼마나 많았을까? 다리건너 저 멀리 아지랭이 너머로 봇짐장수가 나타나면 새댁은 아무도 몰래 쌀독에서 쌀을 퍼서 보자기에 담아 담장너머 어딘가에 숨겨두고는 시치미 떼고 있을 모습을 상상하면서 은근히 웃음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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