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영에서 노무현의 흔적을 찾아본다.

2019년 12월 19일 김해 출장일을 마치고 미루고 미루던 진영의 노무현 전대통령의 생가를 찾았다.

2019년 12월 19일 김해 출장일을 마치고 미루고 미루던 진영의 노무현 전대통령의 생가를 찾았다. 화포천은 김해 방향에서 진행해서 인지 아니면 원래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찾아 가는 길이 꽤나 복잡하고 위험하기도 했다. 화포천에서 대통령의 생가까지는 걸어서는 쉽게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차를 이용할 경우는 한참을 둘러서 가게 되어있다. 그의 영결식날 한참 바쁘게 살던 나는 서울 출장을 가고 있었다. 차를 운전하며 라디오를 들으며 가고 있는데, 운구차량이 조만간 나와 가까와 지고 있음을 알고 안성휴게소 근처의 길가에 차를 세우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를 보낸 기억이 난다.

당시의 나는 정치적 성향이 그와는 반대쪽에 가까운 중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특히, 그는 내가 근무하는 우리대학과도 인연이 특별한 것으로 알고 있다. 민주화 운동이 활발하던 시절 우리대학에는 민주화를 외치는 교수집단과 상당히 강성인 학생집단이 있었다. 민주화 투쟁과정에 교수들은 강의내용으로 학생들은 철도와 고속도로 점거농성으로 재판을 받게 되었을때 이들을 변론해준 사람들이 바로 노무현과 문재인 변호사였다고 한다.

내가 살고 있는 진주에 혁신도시가 들어서고 그나마 죽어가던 진주가 숨을 쉴수있게 된 것도 노무현의 시대에 추진된 지역균형발전 정책이 효과를 발휘해서 이다. 삼성, 엘지, 효성 등 대기업들이 고향도 외면하는 시대에 도청도 빼앗기고 그나마 도시를 지탱해주던 대동공업사의 대구 이전 등 막막하기만 하던 진주사회는 혁신도시의 진주유치에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되었다.

혁신도시 추진계획이 입안되던 당시 지역균형발전의 당위성을 전국에 설파하고 다니던 성경륜 지역균형발전위원장이 마침 사천 출신이라 우리 대학에서 초청특강도 하고 했던 기억이 있다.

당시 기획부처장으로서 대학의 기획실무를 맡아 일하고 있었기에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일이 있다. 당시 조무제 총장은 혁신도시가 진주에 유치되어야 한다는 신념이 확실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진주시청에만 의지해서는 위험할 수 있으니 우리대학이 자체 예산과 전문가를 투입해서 혁신도시 추진방안을 작성해서 진주시에 전달하기로 하고 나에게는 예산확보와 팀 구성을 지시하신 기억이 난다. 내가 아는 범위에서는 진주에 혁신도시가 오게 된 시발점 이였다고 생각되는데, 일이 성사되고 나니 모두들 자기네가 다한 것이라 하니 뭐라 말하기도 그렇다.

 

노무현 대통령의 생가와 묘역 그리고 그의 일대기를 정리해 놓은 판넬을 쭉 둘러보며 드는 생각이 요정도 밖에 안된다.

 

노무현 대통령의 생가

그의 생가는 단촐하다.

묘역

묘역은 그의 인생역정 만큼이나 단순해 보이지만 다양한 내용들로 꽉 차있다.

아래 사진의 안내판 내용을 옮겨보면

 

여기는 ‘사람사는세상’을 꿈꾸었던

노무현 대통령이 잠든 곳이다.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노무현 대통령이 남긴 유지에 따라, ‘대통령 노무현’ 여섯 글자만 새긴 너럭바위 아래에 노무현 대통령을 안장하고 박석길에 새겨진 추모의 글들로 작은 비석의 비문을 대신하였습니다.

바닥에 펼쳐져 있는 1만 5천여 개의 박석은 1만 8천여 국민의 기부로 놓여졌습니다. 많은 국민들의 사랑과 정성으로 완성된 대한민국 최초의 ‘국민참여묘역’입니다.

봉화산 아래, 추모박석과 자연박석이 조화를 이뤄 펼쳐진 묘역 광장은 길과 내, 사람과 집이 어우러져 있는 ‘사람사는세상’을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대한민국 ‘제1호 국가보존묘지’입니다.

그의 일대기를 정리해 놓은 판넬들

관련 사진은 아래에 정리하였다. 클릭하면 크게 볼수도 있고, 다운로드 할 수도 있습니다.

Verified by MonsterInsigh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