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천 해인사

revised at  2019-10-27, 2019-10-30  

해인사는 신라 의상대사의 법손인 순응(順應), 이정(利貞) 두 스님이 신라 제40대 애장왕 3년(802) 10월16일에 왕과 왕후의 도움으로 창건 하였다고 한다. 해인사는 가야산 자락에 17개 암자가 있고, 전국적으로 154개의 사찰이 해인사 말사일 정도로 크고 역사가 깊은 사찰이다.

해인사에 대하여 이곳에 몇마디로 요약할 수는 없는 일이고 해서 해인사 홈페이지 링크를 걸어 두고, 이곳에서는 내가 직접 보고 느낀 부분만 사진과 함께 나열하고자 한다.

해인사 총림 입구

해인사 총림에 들어가기 전 입구에는 예전부터 보았던 공중전화 박스가 아직도 있고, 그 앞에는 당간지주와 일주문이 방문자들을 맞이한다. 천년고목이 양쪽 길가에 높이 솟아있어 방문자를 곧바로 나아가도록 안내한다. 이 길을 따라 조금 더 들어가면 “해인총림”이라는 크다란 간판이 걸려있는 봉황문이 우리를 맞이한다.

해탈문과 주변 조망

봉황문을 들어서면 상당한 높이에 해탈문이 있다. 높은 곳에서 봉황문 방향과 좌우를 둘러보면 높이 솟은 고목들이 전각들을 언제든지 덮칠 것 같은 형상이다.

범종각

해탈문을 들어서면 넓은 마당 왼편에 범종각이 눈에 들어온다.  종각의 기단과 돌기둥이 예사롭지 않고 고풍스럽다.

범종각에는 크다란 종이 있는데 이를 범종이라하고 지옥에서 고통을 받는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해 친다고 한다. 그리고 구름모양의 청동판이 있는데 이것을 운판이라 하고 허공에 떠다니는 모든 중생들의 괴로움과 아픔을 구제하기 위해 친다고 한다. 물고기 모양의 나무가 매달려 있는데 이것을 목어라하고 물속의 모든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소리를 낸다고 한다. 그리고 예불 때와 의식할 때 북소리를 널리 울려 퍼져나가게 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퍼뜨린다는 도 있다.

구광루와 대적광전

범종각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바로 구광루이다. 문지방을 둥그런 나무를 깎아 만든 대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삼층석탑과 해인사의 주 전각인 대적광전이 장엄한 모습으로 압도적인 위엄을 자랑한다.

해인사는 화엄경을 중심 사상으로 하여 창건되었으므로, 거의 모든 절이 흔히 모시고 있는 석가모니불 대신에 화엄경의 주불인 비로자나불이 모셔져 있다. 그래서 법당의 이름도 대웅전이 아니라 대적광전이라고 한다. 지금의 건물은 창건주인 순응스님과 이정스님이 802년에 지은 건물 자리에다 1818년에 다시 지은 것이며, 이 전각에 모셔져 있는 불상인 본존 비로자나불은 1769년에 조성되었는데, 1897년 해인사 대적광전에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아래의 빈자리에는 사진이 정리되는 대로 채워넣을 예정이다.

장경판전(국보 제52호)

장경각을 처음 세운 연대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나, 대장경이 해인사로 옮겨진 때가 1397년임을 미루어 볼 때 지금의 건물은 조선초 무렵인 1488년 쯤에 세워졌으리라고 여겨지는데, 여러 차례에 걸친 부분적인 중수를 거쳐서 오늘에 이르렀다. 장경판전은 모두 네 동으로 되어 있다.

건물이 세워진 곳의 지형적 특장점과 그에 따른 정밀한 설계와 시공에 따른 판각의 보존능력 등은 이미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자세히 사진도 찍고 정리도 해 보고싶지만 요즘은 내부 촬영이 엄격히 제한되고 있다. 

다행히 예전에 찍어 놓은 사진들이 몇장있으니 차분히 정리하면서 나중에라도 이곳에 올릴 생각이다.

사명대사가 입적한 홍제암(보물 제1300호)

홍제암은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켜 나라를 지킨 사명대사가 선조대왕의 하사로 1608년에 창건하여 수도하시다가 입적하신 곳이다.

1614년(광해 6년)에 혜구스님이 영자전을 지어 서산, 사명, 영규 대사의 영정을 봉안하였고, 1674년에 현종께서 홍제당(암)을 사액하였으며 그동안 6차례 보수하였는데, 현존 건물은 당시 고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예산 조치로 1979년 10월에 완전 해체 복원하였다.

경내에는 보물 제1301호 사명대사탑 및 석장비가 있다.

사명대사 부도 및 탑비는 대사의 일대기를 기록한 것으로 1612년(광해4년)에 건립하였고, 1943년에 일본인 합천 경찰서장이 파손하였던 것을 1958년에 복원하였다.

부도는 사명대사의 사리를 봉안한 석조물로서 1610년 입적하신 해에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현장 안내판 참고]

해인사의 상징적인 암자 원당암

원당암은 해인사 최초의 가람으로 신라때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원찰의 역할을 해왔다. 신라 애장왕은 부처님의 가호로 공주의 난치병이 낫게 되자 순응, 이정 두 대사의  발원에 따라 국력으로 해인사를 창건하게 된다. 당시 국왕은 서라벌을 떠나 원당암에서 불사를 독려하면서 국정을 보았으므로 원당암을 수도 서라벌의 북쪽에 위치한 궁궐이라는 뜻으로 북궁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창건 당시에는 이곳의 산 모양이 봉황이 날아가는 모습을 한 비봉산 기슭에 있다하여 봉서사라 이름하였고, 진성여왕 시대부터 본격적인 신라 왕실의 원당이 되어 왔기 때문에 원당암이라 부른 것이다.

또한, 1887년 전후에는 원당정토사라 칭하여 중창불사와 함께 염불만일회를 결사하여 국난극복을 발원하였다.

[현장 안내판 참고]

삼선암

해인사 입구에서 왼편 홍류동 계곡방향으로 가면 지붕이 화려한 매우 큰 건물의 암자가 보인다. 그 앞으로 다리가 놓여있고 다리를 건너서 돌아보면 홍류동 계곡과 함께 어울리는 화려하기 까지 한 이 암자가 삼선암이다.

“삼선암은 1893년에 자홍스님께서 창건한 뒤로 1904년에 보찬스님과 지종스님 두분이 중건한 바 있으며, 최근에 새로이 비구니 선원을 세운 것을 비롯하여 도량의 규모가 꽤 커졌으려니와 면모도 새로워졌다.”고 소개하고 있다.

금선암

삼선암을 지나 홍류동 계곡을 끼고 바로 뒤에 금선암이 자리하고 있다. 특히, 계곡에 축대를 쌓고 세운 오래된 자그마한 건물이 매우 인상적이다. 주로 절에 머무는 학생들이나 휴양하는 사람들이 머무는 곳이라 하는데, 계곡의 물소리와 가야산의 바람과 함께 이런 곳에 머문다면 색다른 깨달음이 있을 법하다. 아담한 다리를 건너면 마당에는 조그만 연못이 있고 잘 꾸며진 것으로 보아 비구니들의 수양처임을 금방 알수 있다.

금선암은 1945년에 하담스님께서 창건한 비구니 수도처로서 해인사와는 가장 가까이 있는 암자라고 한다.

길상암과 불모전

해인사 입구 매표소를 지나 주차하고 홍류동계곡을 건너 해인사 소리길을 따라 진행하다가 언덕위로 오르는 길안내를 따라 산을 오르면 불모전이 보이고 모퉁이를 돌면 산비탈을 따라 조성된 아름다운 암자가 나오는데 이 암자가 바로 길상암이다.

1972년에 영암 대종사께서 창건한 이 암자에는 부처님 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이 있다고 한다.

불모전에는 “마야부인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모후로서 이 세상에 부처님을 탄생하게 한 어머님이시다. 마야보살님에게 기도를 하면 득남성취, 대학입시, 가정풍파, 삼재팔난, 자손건강, 사업번창, 학업성취, 취직승진, 가정의 행복 등 부처님의 가피력이 불자님들의 가정마다 충만토록 해 드립니다”라고 적혀있다.

퇴옹당 성철 대종사 사리탑

현장 안내석에는 아래와 같이 적어놓았다.

나를 찾아 가는 禪의 공간

성철 스님(1912~1993)은 해인총림의 방장과 대한불교 조계종의 6, 7대 종정을 역임하며 올곧은 수행 정진과 중생을 향한 자비의 실현, 서릿발 같은 사자후로 근현대 한국 불교사에 큰 영향을 끼치셨다. 성철스님의 사리를 모신 이 사리탑은 통도사 적멸보궁을 기본형으로 하여 우리나라 전통 부도의 아름다움을 현대적 조형언어로 새롭게 해석한 것이다. 가운데 구는 완전한 깨달음과 참된 진리를 상징하고, 살짝 등을 맞대고 있는 반구는 활짝핀 연꽃을 표현하며, 크기가 다른 정사각형의 3단 기단은 계-정-혜 삼학과 수행 과정을 의미한다. 사리탑을 둘러싸고 있는 참배대는 앞쪽에서 뒤쪽으로 가면서 서서이 높아졌다가 낮아지는데, 이것은 영원에서 영원으로 흐르는 시간의 무한성을 상징한다. 1998년 성철스님의 열반 5주기에 회향하였으며, 여기는 성철스님께서 늘 말씀하신 “자기를 바로 보라” 는 가르침이 살아 있는 ‘선(禪)의 공간’이다.

해인사 성철스님문도회

용문폭포

해인사 소리길의 마지막 정도인 치인리 관광버스 주차장 뒤쪽에는 웅장하고 큰 폭포가 있는데, 용이 살았다고 해서 용문폭포라는 이름이 지어졌다 한다.

이곳의 안내판에는

욕성만인산欲成萬仞山하니
여하일궤지如何一簣止리오.
법왕불유현法王不遺賢이니
용문수투과龍門須透過하라.

“만 길 높이의 산을 만들고자 한다면
어찌 한 삼태기로 끝낼 수가 있으랴.
성군은 절대로 어진 이를 버리지 않노니
모름지기 용문폭포를 통과해야 하느니라.”

라는 시가 적혀있고 설명에는 “작은 바위들이 마치 용의 비늘처럼 널려있어 금방이라도 용이 꿈틀거리며 승천할 듯 수려한 절경을 자랑한다하여 용문폭포라 불리운다. 예부터 기우제를 지내면 효험이 있다고 전해져 일제 때와 광복 이후에도 수차례에 걸쳐 가뭄이 있을 때마다 기우하여 효험을 보았다고 전해진다.”고 적혀있다.

대체로 보아 용문폭포 라는 명칭은 중국의 황하강 중류에 있는 용문폭포 를 원용한 게 아닌가 한다.

농산정(경남 문화재자료 제172호)

해인사 입구 매표소를 지나 주차하고 홍류동계곡을 건너 다리가 나오는데 이 다리를 건너자 마자 정자가 하나 나온다. 이정자가 바로 농산정이다. 

안내문에는 이곳이 신라말의 거유인 고운 최치원 선생이 은둔하여 수도하던 곳이라고 한다. 본래의 정자의 창건시기는 알 수 없으며, 지금의 것은 고운선생의 후손과 유림에 의해 1936년에 중건된 것이다. 이후 1990년에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정자의 건너편에는 치원대 혹은 제시석이라 불리는 석벽이 있고 거기에는 고운의 칠언절구 둔세시가 새겨져 있다. 정자의 이름도 그 시의 한 귀절을 빌어 농산이라 하게 되었다.

정자는 정면 2칸, 측면 2칸 규모의 단아한 정방형 목조와가 건물이다. 정자 현판에는 김영한이 쓴 농산정기와 찬양사 4수가 기록되어 있고 고운선생의 둔세시를 차운한 시 8수가 있다. 시 중에는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차운시도 들어 있다고 한다.

이 정자가 위치한 홍류동계곡에는 암반 곳곳에 글자가 새겨져 있고, 주로 이름들이 많이 새겨져 있는 것이 특이하다. 아마 오래 전부터 이곳에 이름을 새기면 장원이 되거나 무슨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을 법하다. 

관련 사진은 아래에 정리하였다. 클릭하면 크게 볼수도 있고, 다운로드 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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