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인종 때 현유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
창건 당시 강루리 구인동에 있었으나, 세종 때 이 지방에서 문가학의 변란이 있고 난 뒤 서쪽 산기슭으로 옮겼다. 1728년(영조 4) 장의 권대익과 재임 유응명, 김영 등이 명륜당을 중건하였으며, 1740년 이여옥, 권전 등이 대성전을 중수하였다. 1752년에 현 위치로 이건하였고, 1794년(정조 18)과 1841년(헌종 7)에 각각 대성전을 중수하였다. 1895년(고종 32) 교임 권응희, 유의성의 노력으로 교궁을 중수하였다. 현감 현의섭과 김종호, 이병순, 이익현, 이익수가 중수하였으며, 1909년 신문과 동재 등을 보수하였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5칸의 대성전과 7칸의 명륜당, 내삼문, 동재, 서재, 향안실 등이 있으며, 대성전에는 5성(五聖), 송조4현(宋朝四賢), 우리 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조선시대는 국가로부터 토지·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정원 30명의 교생을 교육시켰으나,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을 봉행하며 초하루, 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다. 이 향교는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8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향교에 보관되어 있는 『단성현 호적대장 丹城縣戶籍大帳』은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139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전교 1명과 장의 수 명이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