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제131호, 1964년 6월 10일 지정, 경상남도 합천군 가회면 황매산로<둔내리>)
절터에는 통일신라시대에 만든 합천 영암사지 쌍사자석등(보물 353), 합천 영암사지 삼층석답(보물 480)과 서금당지 좌,우로 합천 영암사지 귀부(보물 489) 2기가 남아있다. 통일신라시대 말부터 고려시대 까지 기둥 초석, 각종 기와와 함께 8세기경이 금동여래입상이 출토되어, 이 절의 창건 연대를 짐작할 수 있다.
영암사지 금당터와 사찰의 흔적들
이 탑은 가운데 몸돌이 무너져 있던 것을 1969년에 복원하였으며, 1차 금당지 앞에 서 있다. 2단의 기단 위에 세워진 3층석탑으로 통일신라석탑의 전형양식을 따르고 있다. 기단은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본떠 새겼다. 1층 모돌이 약간 높은 편이며 2, 3층은 크게 줄었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4단씩이고, 처마 밑이 수평이며 지붕의 경사가 완만한 곡선으로 흘러내려 네 귀퉁이에서 살짝 치켜 올라갔다. 탑의 머리장식부분은 전부 없어졌으나, 3층 지붕틀의 윗면에 구슬과 화려한 장식을 꽂는 쇠막대를 끼우던 구멍이 있다.
위층 기단과 1층 모돌이 약간 높은 느낌은 있으나, 전체의 균형을 잃지 않았으며 각 부재의 짜임새 또한 간결하다. 신라석탑의 양식을 잘 이어받고 있으나, 기둥 표현이 섬약하고 지붕돌 받침수가 줄어든 점으로 보아 건립시기는 9세기경으로 짐작된다.
보물 제 480호, 경상남도 합천군 가회면 황매산로(둔내리)
영암사지 삼층석탑 안내판
영암사터에 세워진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으로, 1933년경 일본인들이 마음대로 가져가려는 것을 마을 사람들이 막아 면사무소에 보관하였다가 1959년 원래의 자리로 옮겨 놓았다. 석등은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을 중심으로 하여, 아래로는 3단의 받침줄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을 얹었다. 사자를 배치한 가운데 받침돌을 제외한 각 부분이 모두 통일신라시대의 기본 형태인 8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자의 뒷발은 아래받침돌을 딛고 있으며, 앞발은 들어서 윗받침돌을 받들었다. 머리는 위로 향하고 갈퀴와 꼬리, 근육 등이 사실적이다. 화사석은 4면에 창이 있고 다른 4면에는 사천왕상이 조각되었다.
지붕돌은 8각으로 얇고 평평하며, 여덟 곳의 귀퉁이마다 자그마한 꽃조각이 솟아있다. 각 부분의 양식이나 조각으로 보아 통일신라 전성기에 비해 다소 형식화된 면을 보이고 있어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지며, 보은 법주사 쌍사자 석등(국보 제5호)과 견줄 수 있는 걸작이라 할 수 있다.
보물 제 353호, 경상남도 합천군 가회면 황매산로(둔내리)
영암사지 삼층석탑 안내판
금당터의 동서에 위치한 두개의 비석은 비와 머리장식이 없어졌다. 동쪽 거북모양의 비석받침(귀부)은 용머리에 목을 곧바로 세운 침찬 모습이다. 겹줄로 귀갑분이 새겨진 등은 급한 경사를 이루고 있어 강인함과 율동감을 느끼게 하고 있다.
서쪽 거북모양의 비석받침은 크기도 작고, 움추린 목에 등도 평평한 편이다. 두개의 비석 모두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나, 이러한 차이에서 동쪽으 비석밭침이 다소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보물 제 489호, 경상남도 합천군 가회면 황매산로(둔내리)
영암사지 귀부 안내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