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법계사

2020년 2월 18일 아침 일찍 중산리에 주차하고 법계사로 향했다. 간밤의 잔설이 상쾌한 기분을 자아낸다.

2020년 2월 18일 아침 일찍 중산리에 주차하고 법계사로 향했다. 간밤의 잔설이 상쾌한 기분을 자아낸다.
법계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인 해인사의 말사이다. 높이 1,400m에 있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사찰로서 544년에 조사(祖師) 연기(緣起)가 인도에서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셔와서 적멸보궁 도량으로 창건하였다. 1405년에 선사 정심(正心)이 중창한 뒤 수도처로 알려졌으며 많은 고승을 배출하였다.

법계사가 흥하면 일본이 쇠한다는 전설로 인해 왜인들에 의해 절이 여러번 불타 없어지는 수난을 당하기도 했다. 일찍이 고려 말에는 남원 인월 황산전투에서 이성계에 대패한 왜적들이 지리산으로 도망쳐와 천왕봉의 성모상을 훼손하고 법계사를 불태우는 악행을 저리른 바 있고, 임진왜란과 한일의 불법합병 때에도 왜인들에 의해 또다시 불태워졌다.

그러나 6·25 때 불탄 뒤 워낙 높은 곳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토굴만으로 명맥을 이어오다가 최근에 법당이 준공되어 절다운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법당 왼쪽에 보물 제473호로 지정된 법계사삼층석탑이 있으며, 절 앞에는 암봉(巖峰)과 문창대(文昌臺)가 있다.

산청법계사 삼층석탑


법계사 사찰에 있는 고려시대의 삼층석탑이다 1968년 12월 19일 대한민국 보물 제473호로 지정되었다.
법당의 왼쪽에 이위치한 이 탑은 바위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탑신부의 몸달고자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었으며, 몸돌 각 모서리인가 기둥을 넓게. 새겼다. 각 층의 지붕돌은 두터운 편이며,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은 3단이다. 탑의 머리장식 부분에는 포탄 모양의 돌이 얹혀있는데, 나중에 보충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처럼 바위를 기단으로 이용한 탑은 신라 이후로 유행하였는데, 이 탑 처럼 아래 기단부를 간략하게 처리한 경우는 드물다, 양식이 간략화 되고 투박한 느낌을 주고 있어서 전형적인 신라석탑 양식에서 벗어난 고려시대 석탑으로 추정된다.

전날 내린 눈이 석탑 주변의 어수선한 모습들을 뒤덮어 주면서 깔끔한 석탑의 모습을 담을 수 있었다. 높은 산의 세찬 바람에 쌓여있던 눈이 다 날려 가도 주변의 틈들을 메우며 깔끔하게 마무리 한 느낌이다.

지리산 법계사 천왕할매상


지리산의 산신은 천왕할매, 마고할매, 마야부인 등으로 불리는 지리산 수호여신이다. 실제로 예전에는 천왕봉에는 마고할매상이 있었다고 한다.지금은 없어진 마고할매상을 최근에 법계사에 다시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산신은 법계사의 산신각에 모셔져 있는데, 지리산은 워낙 커서 산신 할머니가 두 분 계시다고 한다. 한 분은 노고단 쪽에 계시고, 다른 한분은 천왕봉 쪽에 계시는데, 노고단에 계시는 할머니는 마고할매이고, 천왕봉에 계시는 산신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어머니인 마야부인이라는 설, 박혁거세 어머니인 선도성모라는 설, 고려 태조왕건을 낳은 위숙왕후라는 설이 있다고 한다.

지리산 세존봉 능선의 문창대


지리산은 오랜 옛적부터 수많은 선인들이 오르내렸다. 조선의 김종직과 남명 조식 등과 고려의 이인로가 청학동을 찾아 지리산에 들었다. 혼탁한 세상에서 길을 잃은 선인들은 피안의 세계인 지리산에 들어 자신의 나갈 길을 물었다. 이들보다도 앞선 신라 최고의 지성인 고운 최치원도 이곳 지리산을 올랐다.

최치원의 전설이 서린 문창대, 너른 바위암반이 있고, 그 양쪽 아래에는 기단 모양 암반 위에 갈라진 암석이 서로 등을 기대어 하늘을 향해 버티고 선 모습을 하고 있다.
이곳에서 최치원이 활을 쏘고 명상을 했다고 해서 그의 시호인 문창후를 따서 문창대라 불렀다고 한다.

문창대는 법계사의 정면에 위치해 있으며 능선에 돌출되어 보이는데, 사실은 등산 중간중간 곳곳에서 눈에 띄는 암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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